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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나와 함께한 건축이야기 공모전

서울의 얼굴이 되는 다양한 건축물과 거기에 얽힌 우리들의 여러 이야기를 발굴하는 시민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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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최우수상

내 안의 반짝임을 마주하는 시간, 을 품고 있는 공간

에세이   |   최지은

스무 살. 처음 상경해 흑석동에 방을 구하러 갔다. 낡고 낡은 골목을 돌고 돌아 몇 남지 않은 방을 찾아 헤매길 한참, 앞서 걷던 부동산 아저씨가 술자리에서 하는 혼잣말처럼 말을 흘렸다. “흑석동은 떠나기도 쉽지 않지만, 떠나면 꼭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왜요?”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좁은 미로 속 가로등 불빛과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아저씨의 혼잣말을 움켜 잡았던 스무 살의 내 생각만이 남아 있다. ‘나는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말아야지.’

머리 하나도 못 빠져나갈 만한 작은 창이 딸린 방을 구했다. 그것도 겨우. 그 창을 열면 앞 건물의 회색 콘크리트 벽이 보였는데 일 층이랍시고 굵은 쇠창살까지 달려 있어 정말로 감옥 같았다. 단무지처럼 노란 장판 위에 누우면 가위에 눌리곤 했고, 심신의 안정을 위해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옆 방 남자가 샤워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세레나데처럼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말로, 나는 그 방이 싫었다.

도망치듯 그 방의 문을 열고 나와 문 닫은 병원의 복도 같은 길고 서늘한 공간을 통과해 모서리가 부서진 시멘트 계단 몇 개를 밟고 내려와 고무줄을 넘듯 검은 철제 대문을 넘으면, 스무 걸음도 채 되지 않은 곳에 터방내가 있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선배가, 너 여기 모르지? 하며 데려갔던 곳이었다. 기껏해야 한두 살 선배였을 텐데. 선배는 선배의 선배의 선배 때부터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그 선배의 선배의 선배가 진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는 믿을 수 없었지만, ~때부터 있었던 곳이라는 말은 믿을 수 있었다. 그래 보였다. 어두침침한 조명이나 붉은 벽돌, 낡은 메뉴판 같은 건 그렇다 쳐도 그 무수히 많은 낙서들이 시간을 속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렸을 때는 어른들의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쑥스럽고 민망해서 기억나지 않는 척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 터방내에서 나는 끝까지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처럼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도 했고, 자지러질 듯 웃기도 했고, 세상 정의로운 사람처럼 열변을 토하거나, 붉은 벽돌에 머리를 박고 말을 잃기도 했다. 그러다 굵은 매직으로 그려놓은 하트를 발견하면 알지도 못하는 연인들에게 헤어지라고 저주도 해봤지만, 딱히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방에 살면서도, 그 어두컴컴한 곳이 뭐가 좋았는지 나는 자주 누군가와 함께 그 붉은 벽돌에 둘러싸인 공간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투사들처럼 갓등 아래에 제법 진지한 그림자들을 펼쳐놓고 닥쳐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그래봤자 정치가 어떠니 경제가 어떠니 칸트가 어쩌니 교수님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모두가 빛났다. 모두의 눈이 어둠 속 작은 맹수의 눈처럼 반짝였다.

터방내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곳에 있을 때면 모두가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정열적인 벽돌과 은밀한 갓등에 새겨진 낙서들과, 갓등 아래로 오가는 말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중요하지 않은 대사가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발걸음과 지상의 출입구 앞에서 피어나는 담배 연기는 온 세상의 근심을 다 담은 듯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소문으로는 선배의 선배의 선배도 그랬던 곳이었다.

그랬던 선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무렵엔 나도 누군가의 선배가 되어 있었다. 이력서라는 이름 아래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고 있자면, 큰 세상과 먼 미래를 걱정하던 것은 마치 전생의 일 같았다. 그랬던 선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선배들은 취직했을까.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저 그런 중년이 되어 버렸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을 때쯤엔 나는 흑석동을 떠나있었다.

 

겨우 사회인의 궤도에 안착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작년 가을이었다. 어째서인지 문득 흑석동에 가고 싶어져, 갔다. 수없이 오르내렸던 캠퍼스와 원룸촌 골목을 거니는데 참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술병과 함께 뒹굴던 푸른 잔디와 목재 벤치, 지긋지긋했던 계단, 아담했던 카페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의 건물들과 에스컬레이터, 생각지도 못했던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언제는 없었냐는 듯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딱히 무언가를 기대하고 간 건 아니었는데,

터방내만은 그대로 있었다.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 같았다. 빨려가듯 지하로 내려가며 내부는 무언가가 변했겠지, 라고 생각했건만 그 아래까지도 그대로였다. 전화기도, 갓등도, 메뉴판도, 심지어 파르페마저도!

신기한 마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며, 낙서를 읽으며, 커피를 마시며, 갓등을 흔들어 보며, 커피를 마신 기분을 음미하며. 평소와는 다른 생각을 했다. 유언장이나 버킷리스트라도 쓰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내가 지금 안착한 위치와 내가 앞으로 나아갈 궤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궤도가 우주의 어디쯤에 있는지도.

그런 공간이 있다. 좁지만 넓게 생각하게 되는 곳. 낡았지만 새로운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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