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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나와 함께한 건축이야기 공모전

서울의 얼굴이 되는 다양한 건축물과 거기에 얽힌 우리들의 여러 이야기를 발굴하는 시민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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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감응, 핑크집을 짓다

에세이   |   이지현


 

 

 

행복한 감응, 핑크색 집을 지었다

 

 

 

집을 지으려고 마음먹은 순간 왜 색채부터 떠올렸을까. 그 색은 핑크였다. 

사회학자 조 파올레티에 의하면 19세기 초만 해도 분홍색은  ‘열정과 용기’를 상징하는 남자아이들의 색으로 선호되었고,  ‘더 섬세하고 얌전’하며 ‘믿음과 평온’의 상징인 파랑은 여자아이들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지나서 분홍은 여성을 나타낸다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이런 관점에서 강건하고 명시적으로 보여야 하는 건축에 핑크 옷을 입히겠다고 건축가를 비롯해 모두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했다. 건물을 보면서 우리는 창호와 문, 벽의 질감 등으로 그 집의 분위기를 생각해보지만, 무엇보다도 색채는 그 집을 말하는 언어며 정체성이다.  

   

핑크색은 사람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부드럽고 다정다감하다. 분홍 일색인 형무소가 재범률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연구결과를 보더라도 핑크는 주택의 색으로 제격이라고 굳게 믿었다. 경제적 안정을 ‘핑크 무드’,  ‘핑크리본’은 희망, 반 전쟁을 지향하는 ‘코드 핑크’는 행복과 평화를 상징한다. 

이렇게 핑크는 매우 바람직한 색인데도 주택은 왜 핑크가 없을까. 그리고 내가 살 집을 지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고 먼저 생각했을까. 개성보다는 공동체에, 개인보다는 휩쓸림의 문화에 너무 적응이 되어서 혼자 동떨어지는 것을 대부분은 두려워한다. 만일에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상황이 될 때는 즉시로, 거의 경원시된다. 

나는 처음부터 골목이 있는 동네로 들어서면서 핑크와 묵은 골목이 있는 동네 풍경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시지프스처럼 등에 지고 들어설지 몰라서 걱정이 우선되었다. 

 

집을 구매하기 위해 몇 군데 마을을 다니고, 건축을 위해 다양한 책들을 읽었지만 어디에도 핑크 집은 없었고 핑크를 주장할만한 참고사항도 없었다. 상업적 공간이 아니면 거주하는 주택으로서는 핑크는 점잖은 색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핑크는 매우 굳건하면서도 온갖 의문으로 범벅이 된 무지개떡 같은 것이었다.         

구매한 구옥은 동네의 막다른 골목이 있는 곳이었다. 몇 십 년씩 오래 거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집들은 빌라들과 거주 주택들이 함께 뒤섞여 마치 비 온 후 돋아나는 풀들처럼 어떤 면에서는 싱싱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질서가 없었다. 도시계획이 생기기 전에 지어진 집들이어서 그냥 정겨운 골목길의 풍경을 드러내면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골목길에서 핑크에 대한 내 외경심은 어쩌면 무너질지도 몰랐고, 지탄받을지도 몰랐다.

건축이 색을 입으면 이미 그 집은 말을 하고 있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오가는 사람들은 감응하고 정서적으로 어떤 동질감이나 혹은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주택이 혼자 외딴 산속에 임의로 지어지는 것이 아닌 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붙박이로 영영 남아야 한다. 

그럴 때 건축은 단순히 개인의 거주 차원을 넘어 골목길, 그 동네, 그 거리, 그리고 거주로서의 문화가 된다. 그래서 골목에 녹아든 핑크집을 구현하기 위해서 몇 가지를 계획했다. 

 

먼저 구옥의 담장부터 허물어 도로와 연결해 소통과 개방을 꾀했다. 있던 철문을 떼냈다. 두 겹 세 겹의 대문을 만드는 집을 짓지 않기로 했다. 문도 가벼워 보여서 누구에게나 개방적으로 보이는 흰 나무문으로 현관과 골목을 연결했다. 그 문마저 우리는 불투명 유리가 위에 붙은 것을 택했다. 

드라마 <퀸스 갬빗>에서 여주인공이 뛰어 들어가는 바로 그 유리창이 붙은 문이다. 갬빗의 집 대문에 난 창은 단절이 아니라 세상에 손을 내미는 고아 소녀의 삶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처럼 우리도 핑크색 집을 지으면서 세상에 등을 돌리고 선 집이 아니라 손을 내미는 집으로 만들고 싶었다.   

문의 기능은 외부와 내부 즉 사회적인 기능과 개인적인 기능을 동시에 가진다. 담도 없애고 유리가 붙은 현관문을 선택하면서 우리는 골목을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골목의 풍경을 끌어들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웃음소리, 소곤대는 말소리,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 금세라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음식이 익어가는 냄새가 건너오는, 어쩌다 창가에 쳐진 커튼이 걷히면서 사람의 그림자가 드러나는, 골목의 풍경이 되리라고.  

 

집 앞마당에 소백산에서 온 토종 라일락 나무도 심었다. 봄의 끝 무렵에는 연보라색 꽃들이 피었다. 이제는 꽃향기로 누구나 지나가면서 무슨 꽃이냐고 묻는 향기로운 골목 풍경이 되었다. 

알랭 드 보통이 집이 주는 의미를 '공간과 희망의 일치감'이라고 할 때 핑크색 집을 스스럼없이 지은 것에 대해서 이제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물리적으로는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들어왔고, 개방에서 폐쇄로 들어왔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들어왔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선호도가 높은 아파트에서, 들어오기 꺼려하는 주택으로 들어온 결과였다.  

그러나 막상 골목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자 그런 물질 가치만이 아니라 감성가치, 노스탤지어의 가치에 대한 것이 삶에서 얼마나 윤기 나는 일인지를 깨달았다. 물질이 감성으로 치환되는 순간 모딜리아니의 추상화 같은 골목들은 좁지만 넓었고, 폐쇄적이지만 오히려 개방적이었다. 오랜 철학자처럼 심사숙고할 수 있는 미로형의 골목으로 들어선 것을 깨달았다.

김춘수는 시 <꽃>에서 이름을 부르고 바라보면 의미가 있을 거라고 했지만, 집은 이름도 없이 핑크색으로 의미부여를 먼저 한 셈이다. 

 

실제로 핑크색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 집이 이상하지 않을까, 핑크 집이 들어섬으로써 동네의 이미지를 망치지 않을까 우려했다고 말했다. 혼자 튀면 어쩌지라고 걱정했다니.           

그러나 막상 지은 후에는 만나는 주민들마다 동네가 너무 환해졌다고 모두 진심으로 좋아했다. 심지어 집 짓고 이사 와서도 골목은 쓰레기로 넘쳐나서 대책도 없을 정도였다. 통장님이나 일주일에 3회를 오는 미화원 아저씨도 "여긴 원래 그래요"라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도 오랫동안 막다른 골목은 커다란 쓰레기통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바뀌었다. 서로 조심하면서 쓰레기 없는 골목, 꽃 화분이 놓인 골목, 오래된 계단들을 다시 흰 페인트칠로 예쁘게 색칠하는 동네로 변했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납득이가 걸터앉았던 계단처럼 몇 개의 계단에는 잠시 앉아서 쉬어가는 사람도 있다. 동네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어떤 분은 내 손을 잡고, 이런 골목길에 돈을 써서 집을 예쁘게 지어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송구스럽게 하고 쑥 부꾸미까지 해주셨다. 그걸 보면서 마을은 함께 가꾸어가는 곳이었고, 집을 핑크로 한 것이 정말 잘했다고 계속 생각하는 중이다.  

골목에 핑크 집이 들어서면서 겉으로는 외따로 반짝 켜져 보였지만, 외로운 섬처럼 혼자 떠도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스며들었다.

르 꼬르뷔제는  “색채라는 것은 서술적인 것이 아니라 활기차고 상징적인 것이다. 이것이 목적이지 수단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렇다. 핑크색은 어느 골목 안에서 이처럼 활기차고 상징적일 수 있어서 흐뭇하다. 집의 색채란 그 터와 그 자리에 알맞은 유연성을 가질 때 행복하고 따뜻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집을, 공간을 구성하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기억과 추억의 장소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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